책소개 -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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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5,676회 작성일 06-11-16 10:01본문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한비야 지음
푸른숲 / 2005년 9월 / 307쪽 / 9,800원
들어가는 글 - 견딜 수 없는 뜨거움으로
아직까지 나를 세계 일주 하는 사람으로 알고 있다면, 오지 여지도 밖으로 행군하라행가 한비야는 잊어주기 바란다. 이제 나는 긴급구호 요원으로 완전히 변신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얘기하면 많은 사람들이 “긴급구호가 뭐하는 거예요?”하고 묻는다. 긴급구호는 한 마디로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는 사람들을 신속히 살려내고 하루빨리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그런데 뜬금없이 웬 긴급구호? 여기엔 사연이 있다. 벌써 5년 전의 일이다. 세계 일주를 마치고 중국에서 공부를 하고 있을 때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예? 월드비전이라구요?” 속으로 어느 안경점에서 나이 든 분이 전화를 하셨나 했는데, 글쎄 국제 구호 단체의 회장님이셨다. 나더러 긴급구호 팀장으로 일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하러 전화하신 거였다. 순간 너무 좋아서 천장을 뚫고 나갈 뻔했다. 야호! 야호호오! 드디어 내 소원이 이루어지는구나.
그랬다. 7년 동안 오지 여행을 하면서 여행이 끝나면 난민 돕는 일을 하게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설사같이 시시한 병으로 죽어가는 아이를 살리는 데 필요한 건 링거 한 병이고, 그 한 병이 단돈 8백 원이라는 사실을 오지 여행을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그렇게 막연히 꿈만 꾸던 일을 해보겠냐는 전화를 받았으니 얼마나 놀라고 기뻤는지. 하지만 다음 순간 덜컥 겁이 났다. 이 뜨거운 마음이 그저 한 순간 지나가는 열정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난 회장님께 내 마음을 자가 점검할 기회를 달라고 했다. 진행 중인 긴급구호 현장에 직접 다녀왔으면 좋겠다고. 회장님은 너무나 순순히 그러자고 하셨고, 난 케냐와 캄보디아 현장에 다녀올 기회를 얻었다. 거기서 목마른 사람에게는 물을, 배고픈 사람에게는 빵을 가져다주는 일이 얼마나 가슴 뻐근한 일인지 확실히 알았다.
이 일을 하기로 결정한 직후 한 대학생이 물었다. “재미있는 세계 여행이나 계속하지 왜 힘든 긴급구호를 하세요?” “이 일이 내 가슴을 뛰게 하고, 내 피를 끓게 만들기 때문이죠.” 나는 사람들에게 새장 안에서는 도저히 느낄 수 없는, 이 견딜 수 없는 뜨거움을 고스란히 전해주고 싶다. 제발 단 한번만이라도 자신의 가슴을 뛰게 하는 일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오늘도 나에게 묻고 또 묻는다. 무엇이 나를 움직이는가? 가벼운 바람에도 성난 불꽃처럼 타오르는 내 열정의 정체는 무엇인가? 소진하고 소진했을지라도 마지막 남은 에너지를 기꺼이 쏟고 싶은 그 일은 무엇인가? 지금으로서는 그것이 긴급구호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래서 기쁘다.
한비야, 신고합니다! - 아프가니스탄
2001년 10월, 드디어 월드비전 긴급구호 팀장이 되었다. 혼자서 계획하고 결정하는 독립군에서 조직의 시스템지도 밖으로 행군하라과 함께 돌아가야 하는 연합군이 된 것이다. 월드비전에 출근한 첫날, 미군의 아프가니스탄 공습이 시작되었다. 아, 아프가니스탄! 이 나라와 나는 무슨 인연이 이다지도 깊은 걸까. 1996년 초겨울 나는 아프가니스탄 북부 헤라트에 있었다. 무장한 탈레반이 거리를 활보하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고, 나는 눈총을 견디다 못해 그곳을 떠나려는데 누군가 나를 불렀다. 돌아보니 지뢰로 왼쪽 다리와 오른팔을 잃은 여자아이가 까만 눈망울을 반짝이며 수줍게 빵을 건넸다. 한순간 망설였다. 이 빵을 아이가 먹고 배가 부른 것이 좋을까, 내가 먹고 우린 친구라는 것을 알게 해 주는 게 좋을까. 잠깐의 망설임 끝에 빵을 받아 한 입 덥석 베어 물었다. 같이 있던 아이들이 손뼉을 치고 어깨춤까지 추며 좋아하는 모습이라니…. 그날 나는 앞으로 내가 할 일을 결정했다. 이 여행이 끝나면 난민들을 위해 일하리라고. 특히 아이들을 위해 나를 아낌없이 쓰고 싶다고. 그런데 놀랍게도 나의 첫 파견지는 바로 6년 전 그 아이들을 만났던 아프가니스탄의 헤라트였다.
저 먼지가 모두 밀가루였으면
여기는 쿠차마을. 세상과는 당나귀가 겨우 지나갈 만한 좁은 길로 연결되어 있어 차로는 갈 수 없는 곳이다. 지금은 건기라 강이 바닥을 드러낸 울퉁불퉁한 돌길을 지나서 험준한 산골동네에 도착했다. 마을로 걸어 들어가는데, 다섯 살 정도의 여자아이가 땅에서 뭔가를 찾아 겨우 흙만 털고는 게걸스레 입에 넣는다. 그러다 나를 보더니 얼른 손을 뒤로 감추며 수줍게 웃는다. 입 주위에는 시퍼런 풀물이 들어 있다. 먹고 있는 것은 시금치처럼 생긴 야생풀. 미리암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 아이를 따라 집에 가보았다. 깜깜한 방 안에 죽은 듯 누워 있는 갓난아기, 나오지 않는 젖을 물려보는 젊은 엄마, 두 살이 넘도록 걷지 못하는 꼬마. 가재도구를 다 팔았는지 방 안에는 옷 몇 가지와 빈 냄비만 덩그렇다.
또 다른 집에 가보았다. 열일곱 살 된 엄마가 축 늘어진 한 살 남짓의 아이를 안고 있었다. 날 때부터 시작된 설사가 멈추지 않는다는 아슈라프는 얼굴이 창백하고 수세미처럼 숱 없는 머리카락에 뼈와 가죽만 남아 꼭 미라 같다. “일주일 내로 식량이 오지 않으면 이 아이는 굶어 죽을 거예요.” 그곳 촌장이 말했다. 이 집뿐 아니라 주민 1천 5백여 명이 똑같은 실정이라고 한다. 서부아프가니스탄 지역 53만 명 대부분이 처한 상황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런 식량난이 앞으로 더욱 심각해질 거라는 사실이다. 지난달 파종한 씨가 비가 오지 않아 전혀 싹을 내지 못했기 때문에 올 겨울까지의 수확이 전무할 텐데, 국제기구들의 구호 식량 공급은 대부분 오는 6월로 종료되기 때문이다.
동네 사람들은 입을 모아 어렵게, 어렵게 말한다. 몇 달만, 첫 수확 때까지만 도와 달라고. 동네를 대표하는 아저씨 1백여 명이, 동양에서 온 서너 명의 우리 일행과 흑인 국제 직원 두 명을 마지막 생명줄이나 되는 양 꼭 붙들고 절박하게 애원하는 것이다. 통역으로 따라간 현지 직원 소하일도 시골 사정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며 몹시 충격을 받은 듯 침통해 했다. 그러고는 다짐하듯 나에게 말한다. “한 팀장님, 약속 하나 해줘요. 오늘 본 것을 잊지 않겠다고. 저 아이들을 살려주겠다고.” 정말이지 나도 그러고 싶다. 아, 그런 힘이 내게 있기만 하다면……. 마른 강바닥을 달리는 우리 앞의 자동차가 잔뜩 먼지를 일으킨다. 저 펄펄 날리는 흙먼지가 모두 밀가루라면 얼마나 좋을까!
움직이는 파란 감옥
“미리암, 탈레반도 없는데 왜 부르카를 쓰고 다녀?” 철든 후 단 한 번도 부르카를 쓰지 않고 바깥에 나간 적이 없다는 현지 여직원 미리암에게 물었다. “무서워서요. 지금은 벗어도 된다지만, 나중에 탈레반이 다시 득세하면 지금 벗고 다닌 사람들, 가만 놔두지 않을 게 분명해요.” 탈레반 시절, 자기 언니가 옷 바깥으로 손목이 보였다고 길거리에서 피투성이가 되도록 맞았다며 미리암은 부르카 벗는 것을 몹시 두려워했다. 부르카 뿐만 아니라, 탈레반은 여자들이 있을 곳은 집 아니면 무덤뿐이라고 하면서 여성의 일과 교육을 원천적으로 막았다고 한다. 미리암이 전해주는 탈레반 치하의 일상은 엄격하다 못해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여자는 남자 보호자 없이는 시장이나 병원은커녕 택시도 탈 수 없고, 젊은 여자는 젊은 남자와 이야기해도 안 되며 위반자는 즉시 그 상대와 결혼해야 했단다.
장난기가 발동한 내가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우리 이렇게 한번 해볼까? 나는 네 부르카를 입고, 넌 내 스카프로 머리만 가리고 오후에 주방장이랑 시장 가기.” “네에?”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얼굴까지 발개져 날 쳐다보는 미리암에게 눈을 찡긋해 보였다. 난생 처음 맨 얼굴로 거리에 나선 미리암은 좀처럼 얼굴을 들지 못했다. 뭔가 대단히 어색하고 불편해 보였다. 불편한 것은 나도 마찬가지긴 했다. 부르카는 모자처럼 된 머리 부분을 먼저 쓰면 원피스처럼 생긴 나머지 부분은 넉넉하고 풍성해서 대충 맞게 되어 있다. 하지만 옷자락이 길어 자꾸 발에 밟혔다. 또 눈 부분만 그물망처럼 뚫어놓고 나머지는 몽땅 가렸기 때문에 숨을 제대로 쉴 수 없고, 눈을 가린 그물망도 어찌나 촘촘한지 온 세상이 파란 격자무늬 속에 갇혀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다.
“어휴, 이건 옷이 아니라 감옥이네. 움직이는 파란 감옥!”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부르카를 벗어던지며 말했다. 사무실 현지 직원들은 호기심에 차서 미리암에게 맨얼굴로 다니니까 어떻더냐고 물었다. “벌거벗은 느낌이었어요. 사람들이 모두 나만 보는 것 같고, ‘아니, 감히 부르카를 벗고 다니다니!’라고 질책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 “내일부터 다시 부르카를 입고 다닐래요. 다른 사람들이 다 벗으면 그때 벗으면 되죠.” 길들여진다는 것이 이렇게 무섭다.
“살아줘서 정말 고마워.”
다시 해발 3천 미터 산을 넘고 벼랑길을 10시간 달려서 바드기스 현장에 왔다. 쿠차마을보다 더 깊은 시골로 들어가니 영양실조에 폐결핵까지 만연하는 등 상황은 더욱 나빴다. 네 살짜리 사이드와 생후 팔 개월 된 압둘도 그런 아이들이다. 당장 치료급식을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져 의식 불명 직전인 아이들을 차에 싣고 단숨에 읍내로 달려왔다. 담당 의사가 몇 가지 의례적인 검사를 한 뒤,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너무 늦었어요. 둘 다 살 수 있다고 장담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긴급구호 요원이다. 저 아이들의 목숨이 딱 끊어지기 바로 그 순간까지, 가망성이 0퍼센트가 되는 그 순간까지는 어떻게든 살려내려고 노력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집중 급식을 위해 우리는 네 개 조로 나누어 불침번을 서며 두 시간에 한 번씩 아이들에게 치료 영양죽을 먹이기로 했다. 자주 정신을 잃는 사이드는 꼬집어 깨워서 수저로 떠 먹였고, 삼킬 힘이 없는 압둘은 강제로 입을 벌려 흘려 넣었다. 딱 이 주일이었다. 어느 날 사이드의 목을 왼팔로 받치고 죽을 한 숟가락 떠 입에 넣으려고 할 때다. 아이의 눈이 나와 마주쳤다. 힘이 없어 언제나 허공을 바라보던 눈이었는데…. 반가운 마음에 활짝 웃어주니, 글쎄 아이가 나를 보고 방긋, 웃는 게 아닌가. 아! 살아난 것이다. 순간 가슴이 너무 벅차서 터지는 줄 알았다. ‘고맙다, 사이드. 살아줘서 정말 고마워.’
그러나 같은 날 들어온 압둘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바드기스를 떠나는 날, 마지막으로 치료급식소를 둘러보고는 압둘에게로 갔다. 아이는 여전히 미동도 않은 채 눈만 깜박이고 있었다. 안타까운 마음에 양손으로 아이의 얼굴을 쓰다듬어주었다. 그런데 힘없이 누워 있던 아이가 갑자기 그 조그만 손으로 내 오른손을 잡더니 손가락을 꽉, 깨무는 게 아닌가. 따끔하다. 이도 두 개 밖에 나지 않은 녀석이 마치 “걱정 마세요. 이제 나 힘 세졌어요.”라며 힘자랑을 하는 것 같다. 내 손가락에는 선명하게 이빨 자국이 나 있었다.
현장으로 떠나기 얼마 전에 받은 이메일에서 누군가가 그랬다. 당신들이 목숨 바쳐 일한들, 아프가니스탄에서 고통 받는 사람 전체 중 얼마를 돌볼 수 있느냐, 잘 해봐야 10만 분의 1도 구제하지 못하는 것 아니냐고. 맞는 말이다. 나도 그런 생각이 들면 맥이 빠진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되새긴다. 바닷가에 사는 한 어부가 아침마다 해변으로 밀려온 불가사리를 바다로 던져 살려주었다. “그 수많은 불가사리 중 겨우 몇 마리를 살린다고 뭐가 달라지겠소?” 동네 사람의 물음에 어부는 대답했다. “그 불가사리로서는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건진 거죠.” 이것이 내 마음이다. 그리고 전 세계 긴급구호 요원의 마음이기도 하다.
그러나 구호는 마음만 가지고 되는 일이 아니다. 구호 전쟁을 하려면 사랑의 총알이 필요하다. 구호 자금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내가 아프가니스탄에 오기 직전, 한 아이에게 카드와 함께 꽉 채운 저금통을 받았다. 카드에 적힌 사연은 기도문 형식이었다. ‘하느님, 이제 저는 그만 돌봐주시고 아프가니스탄 어린이들을 돌봐주세요.’ 글씨체로 봐서는 겨우 유치원이나 다닐 만한 아이. 그 조그만 아이가 우리를 어떻게 믿고 자신의 전 재산이었을 저금통을 통째로 보냈단 말인가. 생각할 때마다 정신이 번쩍 난다.
내가 탄 파키스탄 행 비행기가 힌두쿠시 산맥을 아슬아슬 넘고 있다. 기장이 안내 방송을 한다. “우리 비행기는 곧 아프가니스탄 영공을 떠나 파키스탄으로 들어섭니다.” 나도 모르게 가슴에 성호를 그으며 꼬마의 기도를 떠올렸다. ‘하느님, 저는 이제 조금만 돌봐주시고 아프가니스탄 잘 돌봐주세요.’ 호다하페스 헤라트!(헤라트여, 안녕!)
당신에게 내 평화를 두고 갑니다 - 이라크
2003년 6월, 허허벌판의 군용 비행장. 트랩을 내리자마자 훅, 모래 섞인 사막바람이 얼굴을 덮친다. 턱, 숨이 막힌다. 정수리 위로 내리꽂히는 정오의 태양. 어두운 극장에서 나온 것처럼 몹시 눈이 부시다. 오늘 모술의 기온은 섭씨 45도란다. 마중 나온 현지 직원이 방탄조끼를 나누어준다. 모술 지역 연합군 민간 협력 담당 장교가 우리 일행 9명과 일일이 악수를 하며 환영의 뜻을 표한다. 유엔의 엄격한 무게 제한으로 겨우 20킬로그램짜리 배낭을 메고 있을 뿐인데 갑자기 어깨가 뻐근하게 무겁다. 다시 전쟁터에 온 것이다.
긴급구호 요원의 몸값
긴급구호 지역의 안전 상황은 네 가지 색깔로 대별된다. 코드 그린은 안전, 코드 옐로우는 위험소지 있음, 코드 레드는 위험, 코드 블랙은 철수다. 지금 이라크는 코드 레드, 사업을 진행할 수는 있으나 위험 수위가 대단히 높아 상황이 나빠지는 즉시 철수해야 한다. 만약 긴급구호 요원이 인질로 잡히더라도 우리의 몸값은 0원이다. 우리 단체는 납치범들과 몸값 협상을 하지 않는다. 우선 우리 후원자가 한 푼 두 푼 모아준 후원금으로 거액의 몸값을 지불하는 건 옳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구호 단체 직원을 인질로 잡아 몸값을 뜯어내는 그런 세력에게 돈을 주면 그 집단의 힘이 점점 세져서 결과적으로 우리가 도우려는 사람들을 더욱 괴롭히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요원이 인질로 잡히면 우리 단체는 즉각 전문 협상가를 현장으로 파견해 요원이 안전하게 풀려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나, 인질범이 몸값을 요구하면 그 즉시 우리 단체가 할 수 있는 일은 끝난다. 그 후로는 사건이 발생한 나라와 그 직원의 모국 관련자들이 협상을 계속하게 된다. 그러니 잡히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만약 잡히게 되면 현명하게 대처해서 살아남는 것은 순전히 우리 요원들의 몫이다.
내 별명은 마이꼬리
이라크 북부 모술 지역에서 나는 한국, 미국, 호주가 지원하는 식수 사업 총괄책임을 맡았다. 30년 전만 하더라도 이라크의 상하수도와 사회 기반시설은 이웃 나라의 부러움을 샀다. 특히 티그리스 강이 흐르고 막대한 저수량의 댐을 끼고 있는 모술은 항상 물이 풍부했다고 한다. 그런데 두 차례의 전쟁과 경제 제재로 모든 게 엉망이 되었다. 특히 이곳은 화장실 처리를 휴지가 아닌 물로 하는 풍습을 갖고 있는데 물이 없다고 생각해보라. 수인성 전염병과 불결에 따른 각종 질병이 만연할 수밖에 없다.
내 눈으로 직접 본 이곳 물 사정은 생각보다 훨씬 열악했다. 수돗물이라고는 5일에 한 번도 구경하기 힘든 동네가 태반이었고, 주민들은 물탱크 차에서 물을 사 써야 하는데 그 물 값이 1천 리터에 노동자 일당의 절반이다. 사정이 이러니 한낮 기온이 50도가 넘는 살인적인 더위에도 씻기는커녕 먹을 물도 아껴야 할 형편이다. 수백 명이 다니는 학교도 사정은 마찬가지. 조사 나간 학교에는 식수대는커녕 화장실이 하나도 없다. 볼일이 급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물으니 선생님들은 바로 옆의 교장 사택으로 달려가고, 학생들은 하루 종일 참거나 급하면 아무 데서나 일을 본단다.
우리는 아이들이 적어도 학교에 와서는 깨끗한 물을 실컷 마실 수 있고, 지역 주민들도 학교에 와서 물을 길어갈 수 있도록 학교를 통한 식수 사업을 벌이기로 결정했다. 학교 사업 외에 마을 공동 우물 설치를 위한 현지 조사차 여러 시골 마을을 돌았다. 식수원이 마땅치 않은 한 마을을 돌다가 이곳 공터에 공동 우물을 새로 파서 주민들 모두에게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있게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같이 갔던 수석 엔지니어에게 의견을 묻자, 당장 줄자로 바로 앞 학교까지의 거리 등을 재보더니 할 수 있겠다고 엄지손가락을 펴 보인다. 통역을 통해 우리 뜻을 전하니, 종교 지도자가 갑자기 “마이 꼬리, 꼬리 와히드!(한국 최고!)”라고 소리치며 뛸 듯이 좋아한다. 이 말을 들은 아이들도 덩달아 좋아하며, 내가 그 동네에 있는 내내 졸졸 따라다니면서 ‘마이 꼬리, 마이 꼬리’ 합창을 한다.
“마이 꼬리가 뭐예요?” “마이는 물, 꼬리는 한국인. 그러니까 ‘물을 가져다주는 한국인’이라는 뜻이에요.” 그 후 이 별명은 그곳에서 내 이름이 되었다. 그날 따라갔던 우리 운전사를 시작으로 곧 통역이, 수석 엔지니어가, 사업을 진행하는 동네 사람들이, 나중에는 사무실에 있는 현지 직원 모두 나를 ‘마이 꼬리’라고 불렀다.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신난다. 그리고 사랑받고 있는 기분이다.
번개 생일 파티
모술에서의 내 일상은 간단하지만 녹록치는 않다. 아침부터 오후까지는 이라크 현장 일을 하고, 오후부터 새벽까지는 한국 신문사에 보낼 글을 쓰거나 전화 또는 인터넷 인터뷰를 하고, 급한 한국 사무실 일까지 본다. 이라크에서 맞은 내 생일, 그 전날 밤새 쓴 신문 칼럼을 아침에 이메일로 보내려는데 자꾸 오류가 생겼다. 우여곡절 끝에 유엔 연락사무실 인터넷을 잠깐 빌려 칼럼을 보내긴 했지만 내 메일은 하루 종일 체크할 수가 없었다. 오늘같이 메일이 많이 들어올 것 같은 날, 하필 인터넷에 문제가 생길 게 뭐람. 내내 시무룩해서 말수가 적으니까 보는 우리 팀원마다 어디 아프냐고 물어본다.
그날 저녁, 팀원들에게 비빔냉면을 만들어 주겠다니까 입이 찢어진다. 냉면을 맛있게 먹던 수잔이 무심코 묻는다. “비야 언니, 이건 언니 생일에 먹는다고 아끼던 거 아니에요?” “응, 맞아. 오늘이 바로 그날이거든.” “What?(뭐라구요?)” 그때부터 부엌이 벌집을 쑤셔놓은 것 같아졌다. 수잔과 안전 요원 토마스가 즉석 생일케이크를 만들고 커다란 도화지에 직원들이 모두 한마디씩 써서 대형 카드를 만들었다. 어디서 구했는지 빨간 초까지 마련해서 12시가 넘어가면 안 된다며 오밤중에 생일파티를 열어주었다. 미리 말을 안 해줬다고 눈을 흘기면서도 모술에 와서 처음 맞는 요원의 생일이라며 모두가 진심 어린 축하 노래를 불러준다. 괜히 콧등이 시큰하고 손끝이 짜릿하다. 그래, 늘 집 떠나서 사는 사람은 지금 이 순간 함께 있는 사람이 바로 가족이다. 이렇게 생일을 같이 보내는 사람들이 가족이 아니면 누구란 말인가.
코드 블랙, 완전 철수하라
요 며칠간 현장 본부장과 토마스의 얼굴이 심상치 않다. 며칠 전에는 안전하게만 여겼던 우리 물자 창고에 방화가 분명한 불이 났고, 사무실 주인도 더 이상 외국인에게 집을 빌려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협박을 받았다며 이번 달 안으로 사무실을 비워달라고 통고해 왔다. 게다가 숙소에는 한밤중에 그냥 뚝 끊는 괴전화가 연일 걸려오고 있다. 사정이 이렇게 절박한데도 치안 유지를 담당해야 할 점령군은 속수무책이다. 바그다드에 있는 국제 구호 단체들이 대부분 철수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공식적인 안전 상황은 한 달 전과 같은 코드 레드지만 실제로는 코드 블랙에 더 가까운 흑장미색일 거다.
“토마스 어디 있어요?” 막 일과를 끝마치려는 늦은 오후, 유엔 연락사무실 안전 담당이 다급한 얼굴로 우리 사무실에 왔다. 불길한 징조다. 그리고 5분 후, 총 책임자 앤드류가 전 직원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긴장된 얼굴이었다. “우리 사무실은 오늘부터 무기한 폐쇄함. 국제 직원들은 30분 내로 짐을 싸서 아르빌로 떠날 준비를 할 것. 나와 토마스, 재정 담당, 이 세명이 남아 당분간 숙소에서 사무를 볼 것임.” 내용인즉 바그다드에 있는 유엔 본부가 크게 폭격을 당했다는 거다. 미군의 첩보에 의하면 오늘 밤 전국에 있는 유엔 사무실과 국제 NGO에 대한 총공격이 있을 예정이라고 했다.
아르빌로 가는 차 안에서 생각해 본다. “앗살람 알레이쿰(당신에게 평화를)”, “알레이쿰 앗살람(당신에게도 평화를)” 만나는 사람마다 이런 인사를 주고받으며 하루에도 수십 번씩 평화를 빌어보지만 구호 단체 직원도 이렇게 쫓기듯 철수를 해야 할 만큼 이곳은 평화와는 거리가 멀다. 3개월 전까지 이라크는 내게 그저 중동의 한 나라에 불과했다. 그러나 지금은 너무나 소중하고 특별한 나라가 되었다. 나의 눈물과 땀과 기도를 쏟아 부은 나라니까. 내 평생 이렇게 뜨거운 기도를 드린 적이 언제였는지, 이렇게 많은 땀을 흘린 적은 또 언제였는지. 다만 나의 이 모든 것들이 이 나라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마 살라마(당신에게 평화를 두고 갑니다), 이라크. 내 평화와 기도를 이라크에 두고 떠난다. 남김없이.
쓰나미는 과연 천재(天災)였을까 - 남아시아 해일 대참사
“제발 큰일이 아니길…….” 2004년 12월 26일 아침, 출근 준비를 하면서 본 CNN 뉴스에서 인도네시아에서 해일이 발생했다는 자막을 얼핏 보았다. 머리를 말리다가 반사적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지진 규모 9.3리히터. 뭐라고? 눈을 의심했다. 9.3이라니! 지난해 10만 명의 인구 중 4만여 명을 한순간에 앗아간 이란 지진이 6.9였는데. CNN의 뉴스 한 줄이 이렇게 나의 하루를 뒤흔들며 비상사태를 선포한다. 세상이 시끄러우면 긴급구호 요원인 내 생활도 따라서 시끄러워진다.
매 시간 피해 규모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더니 단 세 시간 만에 벌써 사상자가 1천 명이나 발생했다는 보도다. 48시간 대기조인 나는 일단 비상 간부회의를 요청하여 긴급구호 자금 2억 5천만 원을 확보한 후 재빨리 여행사에 전화를 걸었다. “27, 28, 29일 중 언제라도 떠날 수 있는 스리랑카 콜롬보 행 비행기 표를 예약해 주세요.” 그리고 12월 29일 새벽, 콜롬보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나는 지금 지옥에 온 것일까?
쓰나미 발생 3일 차. 여기는 스리랑카 동부 해안 지역 바티칼로다. 생지옥이 있다면 바로 이런 모습이리라. 미처 수습하지 못한 시신이 해변에 방치돼 있고 굶주린 개들이 주위를 어슬렁거린다. 그 위로는 까마귀 떼가 깍깍거리며 하늘을 뒤덮고 있다. 바닷가에 촘촘하던 초가들은 진공청소기가 지나간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물이 덜 빠진 마을에서는 나도 별수 없이 바지를 종아리까지 걷어붙이고 건너다녀야 했다. 발밑에 물컹한 게 밟힐 때마다 시체는 아닐까 얼마나 오싹했는지 모른다. 피난민촌 역시 생지옥이긴 마찬가지다. 불교사원이나 교회, 혹은 학교에 마련한 피난민 캠프에 적게는 수백 명에서 많게는 수천 명까지 모여 있다. 눕기는커녕 앉기에도 비좁은 공간에 갓 태어난 아이부터 팔십 노인까지 섞여 지낸다. 깨끗한 물도 화장실도 없는 집단 수용 생활, ‘전염병 쓰나미’가 우려된다.
재난 발생 14일 차. 여기는 인도네시아 반다아체다. 스리랑카에서 한국으로 돌아갔다가 딱 하루를 자고 인도네시아로 왔다. 쓰나미의 진원지인 반다아체 공항에 내리니 악취가 진동을 한다. 공항 근처에 대규모 시신 매립지가 있기 때문이란다. 현지 직원들은 마스크를 쓰고도 코를 막고 있다. 그동안 대형 현장을 많이 다녔지만 이런 참상은 처음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의 참사라는 신문의 헤드라인이 과장이 아니다. 아체 시만 하더라도 가공할 만한 파도가 무려 5킬로미터나 내륙 깊숙이 들어와 수천 채의 건물을 콩가루처럼 부셔놓았다. 콘크리트 건물도 한순간에 저렇게 박살을 내는데, 사람들은 얼마나 속수무책이었을까.
세계 각국의 군인들과 구호 단체들이 중장비를 동원하여 시체 발굴과 수습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하루에 수천 구 이상을 찾아내는데, 늦은 오후 수거 차량이 오기 전까지 시신들은 까만 비닐에 싸인 채 길 양 옆에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 정말이지 눈을 감고 싶은 현장이다. 그러나 나는 눈을 부릅뜨고 이런 장면들을 꼼꼼히 카메라에 담아야 한다. 괴롭고 끔찍하지만 피할 수 없다. 이게 내 일 중의 하나니까.
쓰나미는 정말 막강한 대자연 앞에서 인간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천재(天災)였을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해일의 진원지였던 인도네시아는 그렇다고 해도, 충분히 대피할 시간이 있었던 스리랑카나 인도 등에서 5만여 명의 사람이 죽은 것은 분명히 인재(人災)다. 인도네시아에서 발생한 해일이 스리랑카와 인도 등에 닿기까지의 시차는 무려 30분. 이 두 나라의 피해 지역은 해안에서 1킬로미터 정도까지로, 쓰나미 직전 어른 걸음으로 15분만 일찍 내륙 쪽으로 피신했어도 인명 피해는 막을 수 있었다. 이곳에 조기 경보 시스템만 가동됐더라면……. 아니, 무슨 최첨단 기술을 동원한 시스템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어촌 마을에 스피커가 있고, 중앙에서 발표한 쓰나미 경보를 그 스피커로 15분전에만 알렸어도 이런 대형 참사를 부르지 않았을 것이다. 정말 안타깝고 억울하다.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재난 발생 석 달 후. 여기는 인도의 땅 끝 마을 까냐꾸미리 어촌이다. 동네 어귀에서 나팔과 북소리가 들려왔다. 악대 뒤에는 금색 무늬가 화려한 하얀 옷을 입은 신랑과 빨간 사리를 떨쳐입은 신부가, 그 뒤로는 머리와 목을 꽃으로 장식한 하객들이 어깨춤을 추며 따라간다. 쓰나미 이후 첫 동네 결혼식이란다. 천막 교실에서 아이들이 구구단을 외우는 소리가 길거리까지 들린다. 수업이 끝난 아이들은 예전처럼 바닷가로 나와 깔깔거리면서 뛰어다니고 아낙들은 헌 그물을 손질하고 있다. 그날 오후, 우리를 안내하기로 했던 이 마을 출신 여직원이 예정일을 앞당겨 옥동자를 낳았단다.
아, 그렇구나. 사랑하는 가족을, 유일한 생계 수단을,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이 모든 것을 빼앗아간 것 같은 쓰나미 이후에도 삶은 이렇게 계속되는 거구나. 등 뒤의 것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만 나아가는 게 바로 생명의 본능이구나. 새 생명이 태어나고, 아이들이 공부하고, 연인들은 결혼하고, 일터에 나가기 위해 준비하는 일상의 삶이 끈질기게 이어지는구나. 이곳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분명해진다. 바로 저 삶의 끈을 놓지 않게 도와주는 것이다.
쓰나미가 일어난 지 100일이 다 되어간다. 초기 구호 활동은 물론 인명을 수색하고 구조하는 것이다. 동시에 몸만 겨우 빠져나온 이재민들에게 음식과 깨끗한 물, 담요 등 기본적인 물자를 제공한다. 나 역시 초기에는 스리랑카와 인도네시아에서 피난민들에게 긴급구호 물자를 나누어주는 일을 했다. 그러나 90일이 넘어 복구 단계에 들어선 지금의 핵심 구호 프로그램은 사람들을 하루빨리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게 돕는 것이다. 그 가운데 하나가 어린이 심리 치료다. 눈앞에서 가족을 잃은 아이들이 마음껏 슬퍼할 수 있도록 하고, 그 아픈 마음을 다독여주고, 너는 피해자가 아니라 용감한 생존자라고 알려주는 것이 아이가 앞으로 정상적인 삶을 살기 위해 꼭 필요하다. 이 치료는 복잡한 상담이나 비싼 약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비슷한 처지의 아이들과 놀이터에서 섞여 놀거나 그림이나 간이 연극을 하는 등 아주 간단한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아이들의 심리 치료소가 놀이터라면, 아이들의 심리 치료는 이전처럼 스스로 벌어서 살 수 있도록 해주는 일이다. 갑작스럽고 어마어마한 재해를 당해 무기력해 있거나 분노에 찬 사람들을 가장 빨리 치유하는 길은 그들이 예전에 하던 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농부는 땅으로, 어부는 바다로. 내가 인도에 간 이유도 어촌 마을에 배와 그물을 지원하는 사업이 잘 진행되는지 보기 위해서다. 때마침 그곳을 방문한 날, 우선 완성된 고깃배 10척의 진수식이 있었다. 이 배 한척에 우리 돈으로 단돈 10만원, 한 가족 구호물자 배분비의 열 달 치다. 이 돈만 있으면 이들은 다른 사람에게 손 벌리지 않고 자기 힘으로 평생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이들에게 전해준 배와 그물은 목숨만 연명하게 하는 또 다른 구호물자가 아니다. 이것은 어부들의 자존심을 세워주는 희망과 미래다.
한비야 청문회
쓰나미 현장을 다녀온 후 한동안 고기는커녕 생선도 먹지 못했다. 악몽도 여러 번 꾸었다. 국제 본부에는 이런 대형 재난 현장을 다녀오면 반드시 정신과 상담을 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는데 그걸 지키지 않아서 그런 걸 거다. 사실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이라크 파견 근무 후 한국에 돌아와서 바로 안면근육과 왼쪽 팔 마비 증상이 왔다. 과도한 스트레스와 누적된 과로로 인해 목뼈에 문제가 생겼단다. 몇 달 동안 한의원과 양의원을 번갈아 다니느라 고생 좀 했다.
하여간 또 다시 이런 대형 재난이 발생하면, ‘이제 끔찍한 현장에 다시는 안 갈래요!’ 할 것 같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오히려 ‘저요, 저요!’ 나를 보내달라고 손을 번쩍 들 것이다. 보낼까 봐가 아니라 실력이 모자라서 안 보내줄까 봐 그게 더 큰 걱정이다. 역시 나는 현장 체질이다. 사무실에서 배우는 것보다 현장에서 직접 몸으로 겪으며 배우는 것이 훨씬 빠르고 정확하다. 이번 쓰나미 재난에서도 참 많이 배웠다. 현장에서뿐 아니라 쓰나미 관련 국제회의에 갈 때마다 쑥 컸다는 느낌이 든다.
쓰나미 구호 덕분에 국내에서도 좋은 소리, 수고했다는 얘기 많이 들었다. 아시안 리더십 컨퍼런스에 참석해 세계 정상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패널리스트도 되어보고, 긴급구호 관련 법규를 만들 때 자문 역할도 했고, 언론의 집중 조명도 받았다. 현장을 다니는 사람으로 마땅히 해야 하는 ‘얼굴 마담’ 역할 때문일 거다. 생생하고 따끈따끈한 현장 얘기는 분명 뉴스로서의 가치도 있을 것이고. 그러나 이런 언론 노출 때문에 내가 이 분야의 대단한 전문가로 보이게 될까 봐 몹시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내가 오지 여행을 하고 지금은 재난 현장에서 일해서인지, 가끔 사람들은 이렇게 묻는다. “세상에 무서운 게 없겠어요?” 왜 나라고 무서운 것이 없을까.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워하는 것은 다름 아닌 헛된 이름, 허명(虛名)이 나는 일이다. 평가절하도 물론 싫지만 지금의 나 이상으로 여겨지는 것이 제일 무섭다. 나의 실체와 남에 의해 만들어진 허상의 차이를 메우기 위해 부질없는 노력과 시간을 들여야 하는 것이 제일 두렵다. 실제로는 오이인데 사람들이 수박이라고 생각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길쭉한 오이는 남 앞에 설 때마다 크고 동그랗게 보이려고 무진장 애를 쓸 것이고, 있지도 않은 줄무늬까지 그려 넣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변장을 하고서도 오이라는 사실이 드러날까 봐 늘 마음 졸이며 살아야 한다.
나는 아무리 수박 노릇이 근사하고 대접을 받는다 하더라도, 가짜 수박보다는 진짜 오이가 훨씬 재미있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얼치기, 함량 미달, 헛 이름이 난 수박보다 진국, 오리지널, 이름값 하는 오이가 훨씬 자유롭고 떳떳할 테니까. 그래야 제 맛을 내면서 자기 능력의 최대치를 발휘할 수 있을 테니까. 조금씩 커가는 과정을 스스로 만끽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오늘도 나에게 묻는다. 가짜배기 수박이고 싶은가, 진짜배기 오이이고 싶은가?
나가는 글 - 가슴 밑바닥에서 울려오는 진군의 북소리
현장에서 찍은 사진 속의 내 얼굴은 거의 다 싱글벙글, 환하게 웃고 있다. 정말로 마음이 놓인 얼굴이다. 그 안타깝고 괴로운 곳에서 어떻게 이런 표정이 나올 수 있는 걸까. 아마도 그건 희망의 싹 때문일 것이다. 재난의 크기와 원인은 달라도 마음을 열고 잘 살펴보면 거기에는 언제나 파란 희망의 싹이 움트고 있다. 혹독한 환경에서 척박한 땅을 뚫고 돋아난 그 작고 기특한 것을 보았으니 어찌 반갑지 않을 수 있을까.
지난 5년간 숨가빴다. 돌아보니 현장에서 울고 웃고 화내고 무섭고 안타까워하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기쁘고 즐거운 일이 더 많았지만 지치고 힘든 날도 많았다. 과도한 업무와 스트레스로 몸과 마음이 곤죽이 되면 저절로 이런 생각이 떠오르곤 했다. ‘정말 힘들어 죽겠군. 이렇게 무리하게 일하는 데가 세상에 어디 있어? 무쇠로 만든 사람이라도 녹고 말겠다.’ 그러나 이렇게 입이 댓발이나 나와 죽겠다고 아우성치면 내 안의 내가 곧바로 튀어나와 묻는다. ‘누가 시켰어? 그렇게 힘들면 그만두면 되잖아?’ 그러면 나는 불에 데기라도 한 듯 화들짝 놀라며 즉시 대답한다. ‘누가 그만두겠대? 말이 그렇다는 거지.’ 마음속의 불평불만과 몸의 고단함이 이 대답과 함께 한 순간에 쏙 들어가 버린다.
그러면 내 안의 내가 다시 묻는다. ‘왜 계속하고 싶은 건데?’ 답은 아주 간단하다. 이 일이 내 가슴을 뛰게 하기 때문이다. 내 피를 끓게 하기 때문이다. 참말이지 5년 동안 해왔지만 지금도 ‘긴급구호’라는 말만 들어도 몸이 뜨거워지고 마음은 어느덧 현장에 가 있다. 이 견딜 수 없는 뜨거움, 이 마음이 식기 전에는 긴급구호를 그만둘 수가 없다. 마음이 온통 여기에 있는데 무슨 다른 일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인생이란 산맥을 따라 걷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산맥에는 무수한 산이 있고 각 산마다 정상이 있다. 그런 산 가운데는 넘어가려면 수십 년 걸리는 거대한 산도 있고, 1년이면 오를 수 있는 아담한 산도 있다. 하지만 어떤 산의 정상에 올랐다고 그게 끝은 아니다. 산은 또 다른 산으로 이어지는 것. 그렇게 모인 정상들과 그 사이를 잇는 능선들이 바로 인생길인 것이다. 철들고 나서 내가 넘어온 산들을 따져본다. 국제 홍보라는 산, 세계 일주라는 산, 중국어라는 산을 넘어 지금은 긴급구호라는 산을 오르고 있다. 이제 5년 차이지만 이번 산은 워낙 크고 높아서 정상에 오르려면 아직 멀었다. 그러나 애초부터 오래 걸릴 것을 각오했기 때문에 진도가 더디게 나간다고 답답해하거나 어느 천 년에 정상까지 가냐며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늘도 나는 행군한다. 지금은 몸에 익지 않은 무거운 배낭을 지고 오르막길을 오르느라 좀 괴롭다. 무엇보다 앞서가는 사람 없이 길 없는 길을 가야 하는 게 제일 힘들다. 이 길 끝은 과연 정상인가, 내가 가진 식량과 장비는 충분한가, 앞으로 닥칠 크레바스와 암벽은 어떻게 넘어가나 하는 생각으로 때로는 버겁고 무섭기도 하다. 그러나 내 능력에 대한 의심이 들 때마다, 기가 꺾여 자신이 없어질 때마다, 몸이 지쳐서 한 걸음 한 걸음이 천근만근일 때마다, 그래서 무릎을 꿇고 싶을 때마다 가슴 저 밑바닥에서 울려오는 진군의 북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나에게 내려진 절체절명의 명령 소리가 들린다.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한비야 지음
푸른숲 / 2005년 9월 / 307쪽 / 9,800원
들어가는 글 - 견딜 수 없는 뜨거움으로
아직까지 나를 세계 일주 하는 사람으로 알고 있다면, 오지 여지도 밖으로 행군하라행가 한비야는 잊어주기 바란다. 이제 나는 긴급구호 요원으로 완전히 변신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얘기하면 많은 사람들이 “긴급구호가 뭐하는 거예요?”하고 묻는다. 긴급구호는 한 마디로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는 사람들을 신속히 살려내고 하루빨리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그런데 뜬금없이 웬 긴급구호? 여기엔 사연이 있다. 벌써 5년 전의 일이다. 세계 일주를 마치고 중국에서 공부를 하고 있을 때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예? 월드비전이라구요?” 속으로 어느 안경점에서 나이 든 분이 전화를 하셨나 했는데, 글쎄 국제 구호 단체의 회장님이셨다. 나더러 긴급구호 팀장으로 일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하러 전화하신 거였다. 순간 너무 좋아서 천장을 뚫고 나갈 뻔했다. 야호! 야호호오! 드디어 내 소원이 이루어지는구나.
그랬다. 7년 동안 오지 여행을 하면서 여행이 끝나면 난민 돕는 일을 하게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설사같이 시시한 병으로 죽어가는 아이를 살리는 데 필요한 건 링거 한 병이고, 그 한 병이 단돈 8백 원이라는 사실을 오지 여행을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그렇게 막연히 꿈만 꾸던 일을 해보겠냐는 전화를 받았으니 얼마나 놀라고 기뻤는지. 하지만 다음 순간 덜컥 겁이 났다. 이 뜨거운 마음이 그저 한 순간 지나가는 열정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난 회장님께 내 마음을 자가 점검할 기회를 달라고 했다. 진행 중인 긴급구호 현장에 직접 다녀왔으면 좋겠다고. 회장님은 너무나 순순히 그러자고 하셨고, 난 케냐와 캄보디아 현장에 다녀올 기회를 얻었다. 거기서 목마른 사람에게는 물을, 배고픈 사람에게는 빵을 가져다주는 일이 얼마나 가슴 뻐근한 일인지 확실히 알았다.
이 일을 하기로 결정한 직후 한 대학생이 물었다. “재미있는 세계 여행이나 계속하지 왜 힘든 긴급구호를 하세요?” “이 일이 내 가슴을 뛰게 하고, 내 피를 끓게 만들기 때문이죠.” 나는 사람들에게 새장 안에서는 도저히 느낄 수 없는, 이 견딜 수 없는 뜨거움을 고스란히 전해주고 싶다. 제발 단 한번만이라도 자신의 가슴을 뛰게 하는 일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오늘도 나에게 묻고 또 묻는다. 무엇이 나를 움직이는가? 가벼운 바람에도 성난 불꽃처럼 타오르는 내 열정의 정체는 무엇인가? 소진하고 소진했을지라도 마지막 남은 에너지를 기꺼이 쏟고 싶은 그 일은 무엇인가? 지금으로서는 그것이 긴급구호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래서 기쁘다.
한비야, 신고합니다! - 아프가니스탄
2001년 10월, 드디어 월드비전 긴급구호 팀장이 되었다. 혼자서 계획하고 결정하는 독립군에서 조직의 시스템지도 밖으로 행군하라과 함께 돌아가야 하는 연합군이 된 것이다. 월드비전에 출근한 첫날, 미군의 아프가니스탄 공습이 시작되었다. 아, 아프가니스탄! 이 나라와 나는 무슨 인연이 이다지도 깊은 걸까. 1996년 초겨울 나는 아프가니스탄 북부 헤라트에 있었다. 무장한 탈레반이 거리를 활보하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고, 나는 눈총을 견디다 못해 그곳을 떠나려는데 누군가 나를 불렀다. 돌아보니 지뢰로 왼쪽 다리와 오른팔을 잃은 여자아이가 까만 눈망울을 반짝이며 수줍게 빵을 건넸다. 한순간 망설였다. 이 빵을 아이가 먹고 배가 부른 것이 좋을까, 내가 먹고 우린 친구라는 것을 알게 해 주는 게 좋을까. 잠깐의 망설임 끝에 빵을 받아 한 입 덥석 베어 물었다. 같이 있던 아이들이 손뼉을 치고 어깨춤까지 추며 좋아하는 모습이라니…. 그날 나는 앞으로 내가 할 일을 결정했다. 이 여행이 끝나면 난민들을 위해 일하리라고. 특히 아이들을 위해 나를 아낌없이 쓰고 싶다고. 그런데 놀랍게도 나의 첫 파견지는 바로 6년 전 그 아이들을 만났던 아프가니스탄의 헤라트였다.
저 먼지가 모두 밀가루였으면
여기는 쿠차마을. 세상과는 당나귀가 겨우 지나갈 만한 좁은 길로 연결되어 있어 차로는 갈 수 없는 곳이다. 지금은 건기라 강이 바닥을 드러낸 울퉁불퉁한 돌길을 지나서 험준한 산골동네에 도착했다. 마을로 걸어 들어가는데, 다섯 살 정도의 여자아이가 땅에서 뭔가를 찾아 겨우 흙만 털고는 게걸스레 입에 넣는다. 그러다 나를 보더니 얼른 손을 뒤로 감추며 수줍게 웃는다. 입 주위에는 시퍼런 풀물이 들어 있다. 먹고 있는 것은 시금치처럼 생긴 야생풀. 미리암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 아이를 따라 집에 가보았다. 깜깜한 방 안에 죽은 듯 누워 있는 갓난아기, 나오지 않는 젖을 물려보는 젊은 엄마, 두 살이 넘도록 걷지 못하는 꼬마. 가재도구를 다 팔았는지 방 안에는 옷 몇 가지와 빈 냄비만 덩그렇다.
또 다른 집에 가보았다. 열일곱 살 된 엄마가 축 늘어진 한 살 남짓의 아이를 안고 있었다. 날 때부터 시작된 설사가 멈추지 않는다는 아슈라프는 얼굴이 창백하고 수세미처럼 숱 없는 머리카락에 뼈와 가죽만 남아 꼭 미라 같다. “일주일 내로 식량이 오지 않으면 이 아이는 굶어 죽을 거예요.” 그곳 촌장이 말했다. 이 집뿐 아니라 주민 1천 5백여 명이 똑같은 실정이라고 한다. 서부아프가니스탄 지역 53만 명 대부분이 처한 상황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런 식량난이 앞으로 더욱 심각해질 거라는 사실이다. 지난달 파종한 씨가 비가 오지 않아 전혀 싹을 내지 못했기 때문에 올 겨울까지의 수확이 전무할 텐데, 국제기구들의 구호 식량 공급은 대부분 오는 6월로 종료되기 때문이다.
동네 사람들은 입을 모아 어렵게, 어렵게 말한다. 몇 달만, 첫 수확 때까지만 도와 달라고. 동네를 대표하는 아저씨 1백여 명이, 동양에서 온 서너 명의 우리 일행과 흑인 국제 직원 두 명을 마지막 생명줄이나 되는 양 꼭 붙들고 절박하게 애원하는 것이다. 통역으로 따라간 현지 직원 소하일도 시골 사정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며 몹시 충격을 받은 듯 침통해 했다. 그러고는 다짐하듯 나에게 말한다. “한 팀장님, 약속 하나 해줘요. 오늘 본 것을 잊지 않겠다고. 저 아이들을 살려주겠다고.” 정말이지 나도 그러고 싶다. 아, 그런 힘이 내게 있기만 하다면……. 마른 강바닥을 달리는 우리 앞의 자동차가 잔뜩 먼지를 일으킨다. 저 펄펄 날리는 흙먼지가 모두 밀가루라면 얼마나 좋을까!
움직이는 파란 감옥
“미리암, 탈레반도 없는데 왜 부르카를 쓰고 다녀?” 철든 후 단 한 번도 부르카를 쓰지 않고 바깥에 나간 적이 없다는 현지 여직원 미리암에게 물었다. “무서워서요. 지금은 벗어도 된다지만, 나중에 탈레반이 다시 득세하면 지금 벗고 다닌 사람들, 가만 놔두지 않을 게 분명해요.” 탈레반 시절, 자기 언니가 옷 바깥으로 손목이 보였다고 길거리에서 피투성이가 되도록 맞았다며 미리암은 부르카 벗는 것을 몹시 두려워했다. 부르카 뿐만 아니라, 탈레반은 여자들이 있을 곳은 집 아니면 무덤뿐이라고 하면서 여성의 일과 교육을 원천적으로 막았다고 한다. 미리암이 전해주는 탈레반 치하의 일상은 엄격하다 못해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여자는 남자 보호자 없이는 시장이나 병원은커녕 택시도 탈 수 없고, 젊은 여자는 젊은 남자와 이야기해도 안 되며 위반자는 즉시 그 상대와 결혼해야 했단다.
장난기가 발동한 내가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우리 이렇게 한번 해볼까? 나는 네 부르카를 입고, 넌 내 스카프로 머리만 가리고 오후에 주방장이랑 시장 가기.” “네에?”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얼굴까지 발개져 날 쳐다보는 미리암에게 눈을 찡긋해 보였다. 난생 처음 맨 얼굴로 거리에 나선 미리암은 좀처럼 얼굴을 들지 못했다. 뭔가 대단히 어색하고 불편해 보였다. 불편한 것은 나도 마찬가지긴 했다. 부르카는 모자처럼 된 머리 부분을 먼저 쓰면 원피스처럼 생긴 나머지 부분은 넉넉하고 풍성해서 대충 맞게 되어 있다. 하지만 옷자락이 길어 자꾸 발에 밟혔다. 또 눈 부분만 그물망처럼 뚫어놓고 나머지는 몽땅 가렸기 때문에 숨을 제대로 쉴 수 없고, 눈을 가린 그물망도 어찌나 촘촘한지 온 세상이 파란 격자무늬 속에 갇혀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다.
“어휴, 이건 옷이 아니라 감옥이네. 움직이는 파란 감옥!”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부르카를 벗어던지며 말했다. 사무실 현지 직원들은 호기심에 차서 미리암에게 맨얼굴로 다니니까 어떻더냐고 물었다. “벌거벗은 느낌이었어요. 사람들이 모두 나만 보는 것 같고, ‘아니, 감히 부르카를 벗고 다니다니!’라고 질책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 “내일부터 다시 부르카를 입고 다닐래요. 다른 사람들이 다 벗으면 그때 벗으면 되죠.” 길들여진다는 것이 이렇게 무섭다.
“살아줘서 정말 고마워.”
다시 해발 3천 미터 산을 넘고 벼랑길을 10시간 달려서 바드기스 현장에 왔다. 쿠차마을보다 더 깊은 시골로 들어가니 영양실조에 폐결핵까지 만연하는 등 상황은 더욱 나빴다. 네 살짜리 사이드와 생후 팔 개월 된 압둘도 그런 아이들이다. 당장 치료급식을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져 의식 불명 직전인 아이들을 차에 싣고 단숨에 읍내로 달려왔다. 담당 의사가 몇 가지 의례적인 검사를 한 뒤,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너무 늦었어요. 둘 다 살 수 있다고 장담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긴급구호 요원이다. 저 아이들의 목숨이 딱 끊어지기 바로 그 순간까지, 가망성이 0퍼센트가 되는 그 순간까지는 어떻게든 살려내려고 노력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집중 급식을 위해 우리는 네 개 조로 나누어 불침번을 서며 두 시간에 한 번씩 아이들에게 치료 영양죽을 먹이기로 했다. 자주 정신을 잃는 사이드는 꼬집어 깨워서 수저로 떠 먹였고, 삼킬 힘이 없는 압둘은 강제로 입을 벌려 흘려 넣었다. 딱 이 주일이었다. 어느 날 사이드의 목을 왼팔로 받치고 죽을 한 숟가락 떠 입에 넣으려고 할 때다. 아이의 눈이 나와 마주쳤다. 힘이 없어 언제나 허공을 바라보던 눈이었는데…. 반가운 마음에 활짝 웃어주니, 글쎄 아이가 나를 보고 방긋, 웃는 게 아닌가. 아! 살아난 것이다. 순간 가슴이 너무 벅차서 터지는 줄 알았다. ‘고맙다, 사이드. 살아줘서 정말 고마워.’
그러나 같은 날 들어온 압둘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바드기스를 떠나는 날, 마지막으로 치료급식소를 둘러보고는 압둘에게로 갔다. 아이는 여전히 미동도 않은 채 눈만 깜박이고 있었다. 안타까운 마음에 양손으로 아이의 얼굴을 쓰다듬어주었다. 그런데 힘없이 누워 있던 아이가 갑자기 그 조그만 손으로 내 오른손을 잡더니 손가락을 꽉, 깨무는 게 아닌가. 따끔하다. 이도 두 개 밖에 나지 않은 녀석이 마치 “걱정 마세요. 이제 나 힘 세졌어요.”라며 힘자랑을 하는 것 같다. 내 손가락에는 선명하게 이빨 자국이 나 있었다.
현장으로 떠나기 얼마 전에 받은 이메일에서 누군가가 그랬다. 당신들이 목숨 바쳐 일한들, 아프가니스탄에서 고통 받는 사람 전체 중 얼마를 돌볼 수 있느냐, 잘 해봐야 10만 분의 1도 구제하지 못하는 것 아니냐고. 맞는 말이다. 나도 그런 생각이 들면 맥이 빠진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되새긴다. 바닷가에 사는 한 어부가 아침마다 해변으로 밀려온 불가사리를 바다로 던져 살려주었다. “그 수많은 불가사리 중 겨우 몇 마리를 살린다고 뭐가 달라지겠소?” 동네 사람의 물음에 어부는 대답했다. “그 불가사리로서는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건진 거죠.” 이것이 내 마음이다. 그리고 전 세계 긴급구호 요원의 마음이기도 하다.
그러나 구호는 마음만 가지고 되는 일이 아니다. 구호 전쟁을 하려면 사랑의 총알이 필요하다. 구호 자금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내가 아프가니스탄에 오기 직전, 한 아이에게 카드와 함께 꽉 채운 저금통을 받았다. 카드에 적힌 사연은 기도문 형식이었다. ‘하느님, 이제 저는 그만 돌봐주시고 아프가니스탄 어린이들을 돌봐주세요.’ 글씨체로 봐서는 겨우 유치원이나 다닐 만한 아이. 그 조그만 아이가 우리를 어떻게 믿고 자신의 전 재산이었을 저금통을 통째로 보냈단 말인가. 생각할 때마다 정신이 번쩍 난다.
내가 탄 파키스탄 행 비행기가 힌두쿠시 산맥을 아슬아슬 넘고 있다. 기장이 안내 방송을 한다. “우리 비행기는 곧 아프가니스탄 영공을 떠나 파키스탄으로 들어섭니다.” 나도 모르게 가슴에 성호를 그으며 꼬마의 기도를 떠올렸다. ‘하느님, 저는 이제 조금만 돌봐주시고 아프가니스탄 잘 돌봐주세요.’ 호다하페스 헤라트!(헤라트여, 안녕!)
당신에게 내 평화를 두고 갑니다 - 이라크
2003년 6월, 허허벌판의 군용 비행장. 트랩을 내리자마자 훅, 모래 섞인 사막바람이 얼굴을 덮친다. 턱, 숨이 막힌다. 정수리 위로 내리꽂히는 정오의 태양. 어두운 극장에서 나온 것처럼 몹시 눈이 부시다. 오늘 모술의 기온은 섭씨 45도란다. 마중 나온 현지 직원이 방탄조끼를 나누어준다. 모술 지역 연합군 민간 협력 담당 장교가 우리 일행 9명과 일일이 악수를 하며 환영의 뜻을 표한다. 유엔의 엄격한 무게 제한으로 겨우 20킬로그램짜리 배낭을 메고 있을 뿐인데 갑자기 어깨가 뻐근하게 무겁다. 다시 전쟁터에 온 것이다.
긴급구호 요원의 몸값
긴급구호 지역의 안전 상황은 네 가지 색깔로 대별된다. 코드 그린은 안전, 코드 옐로우는 위험소지 있음, 코드 레드는 위험, 코드 블랙은 철수다. 지금 이라크는 코드 레드, 사업을 진행할 수는 있으나 위험 수위가 대단히 높아 상황이 나빠지는 즉시 철수해야 한다. 만약 긴급구호 요원이 인질로 잡히더라도 우리의 몸값은 0원이다. 우리 단체는 납치범들과 몸값 협상을 하지 않는다. 우선 우리 후원자가 한 푼 두 푼 모아준 후원금으로 거액의 몸값을 지불하는 건 옳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구호 단체 직원을 인질로 잡아 몸값을 뜯어내는 그런 세력에게 돈을 주면 그 집단의 힘이 점점 세져서 결과적으로 우리가 도우려는 사람들을 더욱 괴롭히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요원이 인질로 잡히면 우리 단체는 즉각 전문 협상가를 현장으로 파견해 요원이 안전하게 풀려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나, 인질범이 몸값을 요구하면 그 즉시 우리 단체가 할 수 있는 일은 끝난다. 그 후로는 사건이 발생한 나라와 그 직원의 모국 관련자들이 협상을 계속하게 된다. 그러니 잡히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만약 잡히게 되면 현명하게 대처해서 살아남는 것은 순전히 우리 요원들의 몫이다.
내 별명은 마이꼬리
이라크 북부 모술 지역에서 나는 한국, 미국, 호주가 지원하는 식수 사업 총괄책임을 맡았다. 30년 전만 하더라도 이라크의 상하수도와 사회 기반시설은 이웃 나라의 부러움을 샀다. 특히 티그리스 강이 흐르고 막대한 저수량의 댐을 끼고 있는 모술은 항상 물이 풍부했다고 한다. 그런데 두 차례의 전쟁과 경제 제재로 모든 게 엉망이 되었다. 특히 이곳은 화장실 처리를 휴지가 아닌 물로 하는 풍습을 갖고 있는데 물이 없다고 생각해보라. 수인성 전염병과 불결에 따른 각종 질병이 만연할 수밖에 없다.
내 눈으로 직접 본 이곳 물 사정은 생각보다 훨씬 열악했다. 수돗물이라고는 5일에 한 번도 구경하기 힘든 동네가 태반이었고, 주민들은 물탱크 차에서 물을 사 써야 하는데 그 물 값이 1천 리터에 노동자 일당의 절반이다. 사정이 이러니 한낮 기온이 50도가 넘는 살인적인 더위에도 씻기는커녕 먹을 물도 아껴야 할 형편이다. 수백 명이 다니는 학교도 사정은 마찬가지. 조사 나간 학교에는 식수대는커녕 화장실이 하나도 없다. 볼일이 급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물으니 선생님들은 바로 옆의 교장 사택으로 달려가고, 학생들은 하루 종일 참거나 급하면 아무 데서나 일을 본단다.
우리는 아이들이 적어도 학교에 와서는 깨끗한 물을 실컷 마실 수 있고, 지역 주민들도 학교에 와서 물을 길어갈 수 있도록 학교를 통한 식수 사업을 벌이기로 결정했다. 학교 사업 외에 마을 공동 우물 설치를 위한 현지 조사차 여러 시골 마을을 돌았다. 식수원이 마땅치 않은 한 마을을 돌다가 이곳 공터에 공동 우물을 새로 파서 주민들 모두에게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있게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같이 갔던 수석 엔지니어에게 의견을 묻자, 당장 줄자로 바로 앞 학교까지의 거리 등을 재보더니 할 수 있겠다고 엄지손가락을 펴 보인다. 통역을 통해 우리 뜻을 전하니, 종교 지도자가 갑자기 “마이 꼬리, 꼬리 와히드!(한국 최고!)”라고 소리치며 뛸 듯이 좋아한다. 이 말을 들은 아이들도 덩달아 좋아하며, 내가 그 동네에 있는 내내 졸졸 따라다니면서 ‘마이 꼬리, 마이 꼬리’ 합창을 한다.
“마이 꼬리가 뭐예요?” “마이는 물, 꼬리는 한국인. 그러니까 ‘물을 가져다주는 한국인’이라는 뜻이에요.” 그 후 이 별명은 그곳에서 내 이름이 되었다. 그날 따라갔던 우리 운전사를 시작으로 곧 통역이, 수석 엔지니어가, 사업을 진행하는 동네 사람들이, 나중에는 사무실에 있는 현지 직원 모두 나를 ‘마이 꼬리’라고 불렀다.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신난다. 그리고 사랑받고 있는 기분이다.
번개 생일 파티
모술에서의 내 일상은 간단하지만 녹록치는 않다. 아침부터 오후까지는 이라크 현장 일을 하고, 오후부터 새벽까지는 한국 신문사에 보낼 글을 쓰거나 전화 또는 인터넷 인터뷰를 하고, 급한 한국 사무실 일까지 본다. 이라크에서 맞은 내 생일, 그 전날 밤새 쓴 신문 칼럼을 아침에 이메일로 보내려는데 자꾸 오류가 생겼다. 우여곡절 끝에 유엔 연락사무실 인터넷을 잠깐 빌려 칼럼을 보내긴 했지만 내 메일은 하루 종일 체크할 수가 없었다. 오늘같이 메일이 많이 들어올 것 같은 날, 하필 인터넷에 문제가 생길 게 뭐람. 내내 시무룩해서 말수가 적으니까 보는 우리 팀원마다 어디 아프냐고 물어본다.
그날 저녁, 팀원들에게 비빔냉면을 만들어 주겠다니까 입이 찢어진다. 냉면을 맛있게 먹던 수잔이 무심코 묻는다. “비야 언니, 이건 언니 생일에 먹는다고 아끼던 거 아니에요?” “응, 맞아. 오늘이 바로 그날이거든.” “What?(뭐라구요?)” 그때부터 부엌이 벌집을 쑤셔놓은 것 같아졌다. 수잔과 안전 요원 토마스가 즉석 생일케이크를 만들고 커다란 도화지에 직원들이 모두 한마디씩 써서 대형 카드를 만들었다. 어디서 구했는지 빨간 초까지 마련해서 12시가 넘어가면 안 된다며 오밤중에 생일파티를 열어주었다. 미리 말을 안 해줬다고 눈을 흘기면서도 모술에 와서 처음 맞는 요원의 생일이라며 모두가 진심 어린 축하 노래를 불러준다. 괜히 콧등이 시큰하고 손끝이 짜릿하다. 그래, 늘 집 떠나서 사는 사람은 지금 이 순간 함께 있는 사람이 바로 가족이다. 이렇게 생일을 같이 보내는 사람들이 가족이 아니면 누구란 말인가.
코드 블랙, 완전 철수하라
요 며칠간 현장 본부장과 토마스의 얼굴이 심상치 않다. 며칠 전에는 안전하게만 여겼던 우리 물자 창고에 방화가 분명한 불이 났고, 사무실 주인도 더 이상 외국인에게 집을 빌려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협박을 받았다며 이번 달 안으로 사무실을 비워달라고 통고해 왔다. 게다가 숙소에는 한밤중에 그냥 뚝 끊는 괴전화가 연일 걸려오고 있다. 사정이 이렇게 절박한데도 치안 유지를 담당해야 할 점령군은 속수무책이다. 바그다드에 있는 국제 구호 단체들이 대부분 철수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공식적인 안전 상황은 한 달 전과 같은 코드 레드지만 실제로는 코드 블랙에 더 가까운 흑장미색일 거다.
“토마스 어디 있어요?” 막 일과를 끝마치려는 늦은 오후, 유엔 연락사무실 안전 담당이 다급한 얼굴로 우리 사무실에 왔다. 불길한 징조다. 그리고 5분 후, 총 책임자 앤드류가 전 직원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긴장된 얼굴이었다. “우리 사무실은 오늘부터 무기한 폐쇄함. 국제 직원들은 30분 내로 짐을 싸서 아르빌로 떠날 준비를 할 것. 나와 토마스, 재정 담당, 이 세명이 남아 당분간 숙소에서 사무를 볼 것임.” 내용인즉 바그다드에 있는 유엔 본부가 크게 폭격을 당했다는 거다. 미군의 첩보에 의하면 오늘 밤 전국에 있는 유엔 사무실과 국제 NGO에 대한 총공격이 있을 예정이라고 했다.
아르빌로 가는 차 안에서 생각해 본다. “앗살람 알레이쿰(당신에게 평화를)”, “알레이쿰 앗살람(당신에게도 평화를)” 만나는 사람마다 이런 인사를 주고받으며 하루에도 수십 번씩 평화를 빌어보지만 구호 단체 직원도 이렇게 쫓기듯 철수를 해야 할 만큼 이곳은 평화와는 거리가 멀다. 3개월 전까지 이라크는 내게 그저 중동의 한 나라에 불과했다. 그러나 지금은 너무나 소중하고 특별한 나라가 되었다. 나의 눈물과 땀과 기도를 쏟아 부은 나라니까. 내 평생 이렇게 뜨거운 기도를 드린 적이 언제였는지, 이렇게 많은 땀을 흘린 적은 또 언제였는지. 다만 나의 이 모든 것들이 이 나라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마 살라마(당신에게 평화를 두고 갑니다), 이라크. 내 평화와 기도를 이라크에 두고 떠난다. 남김없이.
쓰나미는 과연 천재(天災)였을까 - 남아시아 해일 대참사
“제발 큰일이 아니길…….” 2004년 12월 26일 아침, 출근 준비를 하면서 본 CNN 뉴스에서 인도네시아에서 해일이 발생했다는 자막을 얼핏 보았다. 머리를 말리다가 반사적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지진 규모 9.3리히터. 뭐라고? 눈을 의심했다. 9.3이라니! 지난해 10만 명의 인구 중 4만여 명을 한순간에 앗아간 이란 지진이 6.9였는데. CNN의 뉴스 한 줄이 이렇게 나의 하루를 뒤흔들며 비상사태를 선포한다. 세상이 시끄러우면 긴급구호 요원인 내 생활도 따라서 시끄러워진다.
매 시간 피해 규모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더니 단 세 시간 만에 벌써 사상자가 1천 명이나 발생했다는 보도다. 48시간 대기조인 나는 일단 비상 간부회의를 요청하여 긴급구호 자금 2억 5천만 원을 확보한 후 재빨리 여행사에 전화를 걸었다. “27, 28, 29일 중 언제라도 떠날 수 있는 스리랑카 콜롬보 행 비행기 표를 예약해 주세요.” 그리고 12월 29일 새벽, 콜롬보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나는 지금 지옥에 온 것일까?
쓰나미 발생 3일 차. 여기는 스리랑카 동부 해안 지역 바티칼로다. 생지옥이 있다면 바로 이런 모습이리라. 미처 수습하지 못한 시신이 해변에 방치돼 있고 굶주린 개들이 주위를 어슬렁거린다. 그 위로는 까마귀 떼가 깍깍거리며 하늘을 뒤덮고 있다. 바닷가에 촘촘하던 초가들은 진공청소기가 지나간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물이 덜 빠진 마을에서는 나도 별수 없이 바지를 종아리까지 걷어붙이고 건너다녀야 했다. 발밑에 물컹한 게 밟힐 때마다 시체는 아닐까 얼마나 오싹했는지 모른다. 피난민촌 역시 생지옥이긴 마찬가지다. 불교사원이나 교회, 혹은 학교에 마련한 피난민 캠프에 적게는 수백 명에서 많게는 수천 명까지 모여 있다. 눕기는커녕 앉기에도 비좁은 공간에 갓 태어난 아이부터 팔십 노인까지 섞여 지낸다. 깨끗한 물도 화장실도 없는 집단 수용 생활, ‘전염병 쓰나미’가 우려된다.
재난 발생 14일 차. 여기는 인도네시아 반다아체다. 스리랑카에서 한국으로 돌아갔다가 딱 하루를 자고 인도네시아로 왔다. 쓰나미의 진원지인 반다아체 공항에 내리니 악취가 진동을 한다. 공항 근처에 대규모 시신 매립지가 있기 때문이란다. 현지 직원들은 마스크를 쓰고도 코를 막고 있다. 그동안 대형 현장을 많이 다녔지만 이런 참상은 처음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의 참사라는 신문의 헤드라인이 과장이 아니다. 아체 시만 하더라도 가공할 만한 파도가 무려 5킬로미터나 내륙 깊숙이 들어와 수천 채의 건물을 콩가루처럼 부셔놓았다. 콘크리트 건물도 한순간에 저렇게 박살을 내는데, 사람들은 얼마나 속수무책이었을까.
세계 각국의 군인들과 구호 단체들이 중장비를 동원하여 시체 발굴과 수습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하루에 수천 구 이상을 찾아내는데, 늦은 오후 수거 차량이 오기 전까지 시신들은 까만 비닐에 싸인 채 길 양 옆에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 정말이지 눈을 감고 싶은 현장이다. 그러나 나는 눈을 부릅뜨고 이런 장면들을 꼼꼼히 카메라에 담아야 한다. 괴롭고 끔찍하지만 피할 수 없다. 이게 내 일 중의 하나니까.
쓰나미는 정말 막강한 대자연 앞에서 인간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천재(天災)였을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해일의 진원지였던 인도네시아는 그렇다고 해도, 충분히 대피할 시간이 있었던 스리랑카나 인도 등에서 5만여 명의 사람이 죽은 것은 분명히 인재(人災)다. 인도네시아에서 발생한 해일이 스리랑카와 인도 등에 닿기까지의 시차는 무려 30분. 이 두 나라의 피해 지역은 해안에서 1킬로미터 정도까지로, 쓰나미 직전 어른 걸음으로 15분만 일찍 내륙 쪽으로 피신했어도 인명 피해는 막을 수 있었다. 이곳에 조기 경보 시스템만 가동됐더라면……. 아니, 무슨 최첨단 기술을 동원한 시스템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어촌 마을에 스피커가 있고, 중앙에서 발표한 쓰나미 경보를 그 스피커로 15분전에만 알렸어도 이런 대형 참사를 부르지 않았을 것이다. 정말 안타깝고 억울하다.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재난 발생 석 달 후. 여기는 인도의 땅 끝 마을 까냐꾸미리 어촌이다. 동네 어귀에서 나팔과 북소리가 들려왔다. 악대 뒤에는 금색 무늬가 화려한 하얀 옷을 입은 신랑과 빨간 사리를 떨쳐입은 신부가, 그 뒤로는 머리와 목을 꽃으로 장식한 하객들이 어깨춤을 추며 따라간다. 쓰나미 이후 첫 동네 결혼식이란다. 천막 교실에서 아이들이 구구단을 외우는 소리가 길거리까지 들린다. 수업이 끝난 아이들은 예전처럼 바닷가로 나와 깔깔거리면서 뛰어다니고 아낙들은 헌 그물을 손질하고 있다. 그날 오후, 우리를 안내하기로 했던 이 마을 출신 여직원이 예정일을 앞당겨 옥동자를 낳았단다.
아, 그렇구나. 사랑하는 가족을, 유일한 생계 수단을,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이 모든 것을 빼앗아간 것 같은 쓰나미 이후에도 삶은 이렇게 계속되는 거구나. 등 뒤의 것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만 나아가는 게 바로 생명의 본능이구나. 새 생명이 태어나고, 아이들이 공부하고, 연인들은 결혼하고, 일터에 나가기 위해 준비하는 일상의 삶이 끈질기게 이어지는구나. 이곳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분명해진다. 바로 저 삶의 끈을 놓지 않게 도와주는 것이다.
쓰나미가 일어난 지 100일이 다 되어간다. 초기 구호 활동은 물론 인명을 수색하고 구조하는 것이다. 동시에 몸만 겨우 빠져나온 이재민들에게 음식과 깨끗한 물, 담요 등 기본적인 물자를 제공한다. 나 역시 초기에는 스리랑카와 인도네시아에서 피난민들에게 긴급구호 물자를 나누어주는 일을 했다. 그러나 90일이 넘어 복구 단계에 들어선 지금의 핵심 구호 프로그램은 사람들을 하루빨리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게 돕는 것이다. 그 가운데 하나가 어린이 심리 치료다. 눈앞에서 가족을 잃은 아이들이 마음껏 슬퍼할 수 있도록 하고, 그 아픈 마음을 다독여주고, 너는 피해자가 아니라 용감한 생존자라고 알려주는 것이 아이가 앞으로 정상적인 삶을 살기 위해 꼭 필요하다. 이 치료는 복잡한 상담이나 비싼 약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비슷한 처지의 아이들과 놀이터에서 섞여 놀거나 그림이나 간이 연극을 하는 등 아주 간단한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아이들의 심리 치료소가 놀이터라면, 아이들의 심리 치료는 이전처럼 스스로 벌어서 살 수 있도록 해주는 일이다. 갑작스럽고 어마어마한 재해를 당해 무기력해 있거나 분노에 찬 사람들을 가장 빨리 치유하는 길은 그들이 예전에 하던 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농부는 땅으로, 어부는 바다로. 내가 인도에 간 이유도 어촌 마을에 배와 그물을 지원하는 사업이 잘 진행되는지 보기 위해서다. 때마침 그곳을 방문한 날, 우선 완성된 고깃배 10척의 진수식이 있었다. 이 배 한척에 우리 돈으로 단돈 10만원, 한 가족 구호물자 배분비의 열 달 치다. 이 돈만 있으면 이들은 다른 사람에게 손 벌리지 않고 자기 힘으로 평생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이들에게 전해준 배와 그물은 목숨만 연명하게 하는 또 다른 구호물자가 아니다. 이것은 어부들의 자존심을 세워주는 희망과 미래다.
한비야 청문회
쓰나미 현장을 다녀온 후 한동안 고기는커녕 생선도 먹지 못했다. 악몽도 여러 번 꾸었다. 국제 본부에는 이런 대형 재난 현장을 다녀오면 반드시 정신과 상담을 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는데 그걸 지키지 않아서 그런 걸 거다. 사실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이라크 파견 근무 후 한국에 돌아와서 바로 안면근육과 왼쪽 팔 마비 증상이 왔다. 과도한 스트레스와 누적된 과로로 인해 목뼈에 문제가 생겼단다. 몇 달 동안 한의원과 양의원을 번갈아 다니느라 고생 좀 했다.
하여간 또 다시 이런 대형 재난이 발생하면, ‘이제 끔찍한 현장에 다시는 안 갈래요!’ 할 것 같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오히려 ‘저요, 저요!’ 나를 보내달라고 손을 번쩍 들 것이다. 보낼까 봐가 아니라 실력이 모자라서 안 보내줄까 봐 그게 더 큰 걱정이다. 역시 나는 현장 체질이다. 사무실에서 배우는 것보다 현장에서 직접 몸으로 겪으며 배우는 것이 훨씬 빠르고 정확하다. 이번 쓰나미 재난에서도 참 많이 배웠다. 현장에서뿐 아니라 쓰나미 관련 국제회의에 갈 때마다 쑥 컸다는 느낌이 든다.
쓰나미 구호 덕분에 국내에서도 좋은 소리, 수고했다는 얘기 많이 들었다. 아시안 리더십 컨퍼런스에 참석해 세계 정상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패널리스트도 되어보고, 긴급구호 관련 법규를 만들 때 자문 역할도 했고, 언론의 집중 조명도 받았다. 현장을 다니는 사람으로 마땅히 해야 하는 ‘얼굴 마담’ 역할 때문일 거다. 생생하고 따끈따끈한 현장 얘기는 분명 뉴스로서의 가치도 있을 것이고. 그러나 이런 언론 노출 때문에 내가 이 분야의 대단한 전문가로 보이게 될까 봐 몹시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내가 오지 여행을 하고 지금은 재난 현장에서 일해서인지, 가끔 사람들은 이렇게 묻는다. “세상에 무서운 게 없겠어요?” 왜 나라고 무서운 것이 없을까.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워하는 것은 다름 아닌 헛된 이름, 허명(虛名)이 나는 일이다. 평가절하도 물론 싫지만 지금의 나 이상으로 여겨지는 것이 제일 무섭다. 나의 실체와 남에 의해 만들어진 허상의 차이를 메우기 위해 부질없는 노력과 시간을 들여야 하는 것이 제일 두렵다. 실제로는 오이인데 사람들이 수박이라고 생각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길쭉한 오이는 남 앞에 설 때마다 크고 동그랗게 보이려고 무진장 애를 쓸 것이고, 있지도 않은 줄무늬까지 그려 넣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변장을 하고서도 오이라는 사실이 드러날까 봐 늘 마음 졸이며 살아야 한다.
나는 아무리 수박 노릇이 근사하고 대접을 받는다 하더라도, 가짜 수박보다는 진짜 오이가 훨씬 재미있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얼치기, 함량 미달, 헛 이름이 난 수박보다 진국, 오리지널, 이름값 하는 오이가 훨씬 자유롭고 떳떳할 테니까. 그래야 제 맛을 내면서 자기 능력의 최대치를 발휘할 수 있을 테니까. 조금씩 커가는 과정을 스스로 만끽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오늘도 나에게 묻는다. 가짜배기 수박이고 싶은가, 진짜배기 오이이고 싶은가?
나가는 글 - 가슴 밑바닥에서 울려오는 진군의 북소리
현장에서 찍은 사진 속의 내 얼굴은 거의 다 싱글벙글, 환하게 웃고 있다. 정말로 마음이 놓인 얼굴이다. 그 안타깝고 괴로운 곳에서 어떻게 이런 표정이 나올 수 있는 걸까. 아마도 그건 희망의 싹 때문일 것이다. 재난의 크기와 원인은 달라도 마음을 열고 잘 살펴보면 거기에는 언제나 파란 희망의 싹이 움트고 있다. 혹독한 환경에서 척박한 땅을 뚫고 돋아난 그 작고 기특한 것을 보았으니 어찌 반갑지 않을 수 있을까.
지난 5년간 숨가빴다. 돌아보니 현장에서 울고 웃고 화내고 무섭고 안타까워하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기쁘고 즐거운 일이 더 많았지만 지치고 힘든 날도 많았다. 과도한 업무와 스트레스로 몸과 마음이 곤죽이 되면 저절로 이런 생각이 떠오르곤 했다. ‘정말 힘들어 죽겠군. 이렇게 무리하게 일하는 데가 세상에 어디 있어? 무쇠로 만든 사람이라도 녹고 말겠다.’ 그러나 이렇게 입이 댓발이나 나와 죽겠다고 아우성치면 내 안의 내가 곧바로 튀어나와 묻는다. ‘누가 시켰어? 그렇게 힘들면 그만두면 되잖아?’ 그러면 나는 불에 데기라도 한 듯 화들짝 놀라며 즉시 대답한다. ‘누가 그만두겠대? 말이 그렇다는 거지.’ 마음속의 불평불만과 몸의 고단함이 이 대답과 함께 한 순간에 쏙 들어가 버린다.
그러면 내 안의 내가 다시 묻는다. ‘왜 계속하고 싶은 건데?’ 답은 아주 간단하다. 이 일이 내 가슴을 뛰게 하기 때문이다. 내 피를 끓게 하기 때문이다. 참말이지 5년 동안 해왔지만 지금도 ‘긴급구호’라는 말만 들어도 몸이 뜨거워지고 마음은 어느덧 현장에 가 있다. 이 견딜 수 없는 뜨거움, 이 마음이 식기 전에는 긴급구호를 그만둘 수가 없다. 마음이 온통 여기에 있는데 무슨 다른 일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인생이란 산맥을 따라 걷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산맥에는 무수한 산이 있고 각 산마다 정상이 있다. 그런 산 가운데는 넘어가려면 수십 년 걸리는 거대한 산도 있고, 1년이면 오를 수 있는 아담한 산도 있다. 하지만 어떤 산의 정상에 올랐다고 그게 끝은 아니다. 산은 또 다른 산으로 이어지는 것. 그렇게 모인 정상들과 그 사이를 잇는 능선들이 바로 인생길인 것이다. 철들고 나서 내가 넘어온 산들을 따져본다. 국제 홍보라는 산, 세계 일주라는 산, 중국어라는 산을 넘어 지금은 긴급구호라는 산을 오르고 있다. 이제 5년 차이지만 이번 산은 워낙 크고 높아서 정상에 오르려면 아직 멀었다. 그러나 애초부터 오래 걸릴 것을 각오했기 때문에 진도가 더디게 나간다고 답답해하거나 어느 천 년에 정상까지 가냐며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늘도 나는 행군한다. 지금은 몸에 익지 않은 무거운 배낭을 지고 오르막길을 오르느라 좀 괴롭다. 무엇보다 앞서가는 사람 없이 길 없는 길을 가야 하는 게 제일 힘들다. 이 길 끝은 과연 정상인가, 내가 가진 식량과 장비는 충분한가, 앞으로 닥칠 크레바스와 암벽은 어떻게 넘어가나 하는 생각으로 때로는 버겁고 무섭기도 하다. 그러나 내 능력에 대한 의심이 들 때마다, 기가 꺾여 자신이 없어질 때마다, 몸이 지쳐서 한 걸음 한 걸음이 천근만근일 때마다, 그래서 무릎을 꿇고 싶을 때마다 가슴 저 밑바닥에서 울려오는 진군의 북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나에게 내려진 절체절명의 명령 소리가 들린다.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